결카이브 🗂️

필립 파레노 《VOICES, 보이스》

변성하 2024. 3. 18. 15:00

🗣️

파레노에게 전시는 단순히 작품을 배열하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창작 행위입니다. 그의 관심은 오브제를 생산하는 일보다 그것이 전시에서 보여지는 형식과 그 상호작용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파레노의 전시는 시간을 감각하고 경험하는 유동적이고 열린 플랫폼이 됩니다.

- 전시 서문 발췌





예언의 Voices 🎙️

그라운드 갤러리 전경

정신없는 소음, 요동치는 조명들,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내리며 노래하는 퍼포머, 바닥에 놓인 두꺼운 전선들, ‘내 이름은-’을 반복하지만 다음 말을 잇지 못해 허공을 떠도는 배우 배두나의 목소리, 모든 것이 묘하게 들뜬 호흡의 분위기...

커다란 공간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 같았다. 더 정확하게는 나의 내장과 혈액이 일하는 것을 두 눈으로 본 느낌. 말도 안 되게 차가움만 느껴지는 이 콘크리트 공간에서 나는 내 안을 훑고 지나가는 뜨거운 피의 온도를 느꼈다. 머리를 울리는 이 공간이 나를 나에게 닿게 했다.


성하의 코멘트 🎧
나는 이 공간에서 극도의 어지러움과 폐쇄감을 느꼈다. 분명 탁 트인 공간인데도 좁은 엘레베이터에 갇힌 듯 몸이 무거웠다. 여기 저기서 퍼지는 목소리, 기계의 소리, 조명의 번쩍임이 내 바로 옆에서 일어나는 것 같았다. 세포가 되어버린 느낌. 공간이 제시하는 낯섦은 예민함을 이끈다.



눈더미

‘내 집 앞 눈은 내가 치워야 합니다.’
겨울바람에 휘날리는 현수막의 문구는 대개 이렇다.
결국 눈은 상상할 때 낭만이고, 내릴 때는 걱정이며, 내일에는 지독한 노동이 된다. 필립 파레노가 표현한 이 검은 눈, 더 이상 눈이라 부를 수 없이 잔혹하고 질퍽한 대상에게선 어떠한 미적 가치를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이것이 미술관 벽면에 쌓이는 순간 당당히 작품이 된 채 영원히 녹지 않는다. 더 이상 눈더미라 부를 수 없는 그 지점이 나는 어떠한 연유인지 모르게 참 좋다.



흰색 회화 [일곱 개의 패널], 사물의 꿈

흰 캔버스를 바라보며 영상이 나오기를 기다린다. 4분이 넘는 침묵. 전시장에서 이렇게 영상을 오래 기다리긴 처음이다. [흰 캔버스 보기. 서성이기. 옆 작품으로 넘어갈까 고민하기. 다시 캔버스를 서성이기]를 반복하다 보면 순식간에 영상이 캔버스 위에 떨어진다. 1 분 남짓한 상영 시간. 기다린 시간에 비해 현저히 짧은 러닝타임이 아쉽지 않다. 나는 흰색이나 영상을 관람한 것이 아니라 침묵의 시간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얼마나 입으로 뱉어 공기로 흩어지는 음절에 진저리가 났었는지. 얼마나 소음이 겹겹이 쌓인 거리 위를 걸었던지.



내 방은 또 다른 어항

말 그대로 전시장에 물고기가 떠다닌다 !
필립 파레노는 스스로를 drifter, 부유하는 사람이라고 칭한다.

“시작도 끝도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부유하는 순간은 온전히 나와 함께 있는 순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고기처럼 흐느적댄다. 혹은 산소가 부족해 뇌가 마비된다. 땅에 발을 붙이지 않는 순간은 선연한 죽음의 감각과 연결된다. 그러나 죽음은 역설적으로 강력한 삶의 에너지를 품고 있기에 결국 부유하는 모든 것들은 자유로운 생명력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땅과 발 사이 그 빈 공간에서 나는 나와 함께이지 않을까.




성하의 Voices 🎙️

리얼리티 파크의 눈사람
혼란의 시기: 일 년 중 십일 개월은 예술 작품이고 12월은 크리스마스

전시장 곳곳에는 겨울이 있다. 나는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녹아 물이 되는 눈사람과 오너먼트 가득한 크리스마스트리를 마주한다. 눈사람은 눈물처럼 뚝뚝 녹았고, 크리스마스트리는 전시장 외부에 설치되어 있어서 통창으로밖에 보지 못했다. 가까이 있는 데 멀리 있는 듯, 트리는 손을 뻗어도 닿지 않았다.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이 얼마나 잔혹하게 느껴지는지, 회피심이 발동해 눈을 꾸욱 눌러 감는다. 내 소중한 눈사람이 녹아내리는 현상, 한 해의 최후를 알리는 장식품에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관통하고 있다. 무심하게도 계속해서 흐르는 이 시간을 나는 언제쯤 어엿하게 흘려보낼 수 있을까? 아직도 그 무심함은 내게서 미움을 산다.



여름 없는 한 해

겨울이 뜨거운 여름을 집어삼킨 듯 주황빛 눈이 내린다. 이젠 일상에서 너무 자주 보여 익숙한 자동연주피아노지만, 주황색 눈은 그것이 가진 기이함을 배가한다. 디스토피아가 이렇게 아름답다면 더 슬퍼질 것 같다. 피아노를 둘러싼 관람객들 사이로 공기가 가라앉는다. 차분히 퍼지는 암울은 되려 위험하다.


예언의 코멘트 🎧
여름은 영원한 향수이다. 여름을 떠올리며 숨을 참으면 언제나 가슴께부터 여름 냄새가 올라온다. 여름이 가져다주는 그리움을 잃을 수 없다. 차라리 여름이 사라지기 전에 내가 먼저 사라지길 바란다. 여름이 사라진 자리에서 노을을 바라보는 것만큼의 디스토피아가 있을까?



세상 밖 어디든
나는 상품이야
(…)
내게는 그저 이름과 아이디밖에 없었어
(…)
나는 가상의 캐릭터야
하나의 기호
유령(ghost)이 아닌
그저 껍데기(Shell)

  과연 인간이라고 다를까 싶은 마음이 든다. 너무 비관적인가? 인간에게도 상품성이 필요하고 그것이 부각된 지는 이제 오래다. 인간으로서의 적당한 상품성과 적당한 존엄성. 그 사이의 균형을 잡는 노력이 중요한데..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한 번씩은 골머리를 앓으며 이런 존재성에 대해 고민한다. 이런 고민에 대한 답은 절대 딱 떨어지지 않는다. 그저 중도를 찾는 어느 순간, 나는 비로소 삼차원으로 거듭날 수 있겠구나 싶은 마음들이 잡을 수 없는 꿈처럼 둥둥 떠다니기만 한다.





총평 ✴️

예언 : 전시장이 오렌지색으로 물들었다. 우리가 오후 5시에 미술관을 갔었기에, 처음에는 석양 노을로 착각했다. 그러나 이는 <석양빛 만(灣), 가브리엘 타드의 지저 인간: 미래 역사의 단편>이라는 작품으로, 창문에 주황색 시트지를 붙여 지구 사회의 종말을 암시하는 동시에 인류의 새로운 이상향을 꿈꿀 시간이 왔음을 알린다고 한다. 시트지만으로 내 마음에 일렁이는 황금놀을 심어준 필립 파레노의 역량이 놀랍다. 글을 쓰는 지금도 내 얼굴 위에 드리운 붉은색이 가져다준 싱숭생숭함이 선명하다.

성하 : 진정으로 관람객이 주체가 되는 전시였다. 전시장이 하나의 실험적인 공간이 되어 관람객을 자리에 모아두고 현상을 발굴해 내라고 명령하는 듯했다. 또 어떤 공간은 청각, 시각적인 자극이 너무 강해서 어지럼증을 유발하기도 했다. 미술관에서의 체험이 환각 같아서 더욱 어렵다. 정답이 없기에 모든 걸 스스로, 본인에게서 이끌어 내야 하는 전시는 너무 힘들지만 본연의 나를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정말.. 정말 진이 빠질 수 있으니 유의하십시오.
(사바사일 수 있음 🙊)










필립 파레노 «보이스»
리움 미술관
2024. 02. 28. – 07. 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