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카이브 🗂️

LANDING POINT 착륙지점

예언미 2024. 2. 25. 09:13

🛬 ...

그림을 그리는 일이란 늘 세상과 자신 사이 관계를 조율하는 과정의 연속이다.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것들의 총체적 전경 가운데 건져 올린 감각을 재료의 물성으로 변환하는 과정을 통하여서이다. 저마다의 화면은 끝내 하나의 멈춤이 된다. 그리는 이의 지나간 현재가 그곳에 머문다. (중략) 그린 이와 보는 이의 시선이 교차하는 순간마다 현재는 끝없이 새로 태어난다. 지금 여기의 착륙지점에서, 다음 도약의 방향을 가늠하는 잠시의 멈춤 가운데서.


- 전시 서문 일부 발췌





전시 감상 ✴️

B1F  거리의 조율: 경유하는 몸

임노식, 작업실 17,18,19

예언 : 오일이 가진 특유의 무딜 정도로 부드러우면서 명확한 이미지가 직관적으로 나의 시선을 붙잡았다. 캔버스 안 두터운 공기층과 햇빛을 실감하며 공간을 찬찬히 곱씹게 만든다.

작가는 ‘일상의 장면들 속에 깃든‘ 신체를 제시한다.

국어사전 ‘깃들다’의 정의.
1. 아늑하게 서려 들다.
2. 감정, 생각, 노력 따위가 어리거나 스미다.

  
나의 일상 속에 내가 ‘깃들어’ 있다는 생각을 하니 물리적인 신체의 경계선은 태생부터 존재하지 않은 것만 같은 낯선 감각이 불쑥 올라온다. 내 피부를 무언가 휘젓고, 그런 나는 지나가는 곳곳마다 내 일부를 떼어주고, 그런 식으로는 물리적 장소에 ‘깃든다’.

장소에 깃든다는 것은 세계를 포착한다는 것이고 결국 각자만의 피부와 만나 사적인 세계를 구축하려는 시도이다. 흐릿한 이미지가 내 몸 안에서 소화되면 언제든지 생생한 현재로 탈바꿈된다. 신체를 매개로 이미지를 감각함으로써 나는 나를 만들어 나간다.


좌혜선, 가려진 것과 드러난 것 #1

<가려진 것과 드러난 것> 연작은 살갗 아래 미시세계의 상상된 풍경을 회화로 옮긴 작품이다.

성하 : 닿으면 불쾌함이 순식간에 번질 듯이 끈적하고 질퍽하다. 살갗 아래의 미시세계에는 타인이 알지 못하는 개인만의 늪이 있다. 그곳에는 내가 끝내 소화시키지 못한 것들이 모여 있고, 가끔은 바이러스처럼 퍼져 날 갉아먹기도 한다. 작품을 감상하던 그때도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속이 울렁거린다. 보기만 해도 자극이 되어 금방이라도 토할 수 있을 것만 같지만 찝찝하게 남는다. 죽을 만큼 싫어도 내가 가져가야 할 나의 일부다. 애증의 관계 속 빌어먹을 나의 바이러스 - .



1F   감각의 발견: 내밀한 시선

구지윤, 그레이 투 옐로우

예언 : 회색과 노랑의 교차를 보자마자 서울의 야경이 생각났다. 한강 다리들과 고층 빌딩이 내뿜는, 빛이라기보단 기운에 가까운 모습들. 멀리서 보면 그저 아름다운 야경이지만 그 빛 하나하나에 생명이 스며 있다. 차 안, 건물 속, 가로등 아래. 무수한 사람의 생활감이 있는 흔적이다. 도시에 담긴 헤아릴 수 없는 삶들은 태양 아래에서 지글지글 끓다가 밤이 찾아와도 식지 못해 불빛 아래 조용히 증발해버리고 말던데.
그 오싹한 도시의 감각.


성하의 코멘트 👩‍🚀

높은 빌딩벽 사이사이로 지나가는 아무개들의 삶을 의식한다. 사람이 다니지 않는다면 그 많은 빌딩들이 무슨 소용일까 ? 그레이 옆의 옐로우는 마치 배터리 광고 캐릭터가 뛰어다니며 내는 빛 같았다. (에너자이저..)   그래 어쩌면 사람은 존재만으로 충분할지도 모른다.




안지산, 유영

성하 : 작품 속의 먹구름 같은 불안이 생기면 마음이 붕 뜬다. 땅에 닿지 않는 발, 방향을 잡으려 뻗어본 손, 가려진 시야가 복합적으로 애처롭다. 그림에서 나의 초상을 마주하며 아이러니한 편안을 만끽한다.
불안 속의 유영은, 때때로 꽤 쌉사름하다 느껴질 만큼 달콤한 구석이 있다. 이제 이런 류의 불안은 적당히 즐기는 수준에 이르렀다. 바람에 몸을 맡기고 이 순간에만 출 수 있는 춤을 춘다. 깊은 고뇌는 언젠가 분명히 나를 평지에 착륙시켜 줄 테니까. 늘 그래 왔듯 그렇게 .



3F  인식의 방식: 확장된 시선

정주원, 가시 돋친 균형

예언 : 요시모토 바바나의 소설 <암리타>가 생각났다.

(1)
「아무리 엉망진창이 되어도 균형만 잘 잡혀 있으면 제대로 돌아간다는 걸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그리고 사랑」

(2)
「옷도, 머리 스타일도, 친구도, 회사도, 자기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도.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 훗날 진정한 <자기>가 자리 잡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싶다. 그 사람이 그 사람임은, 망가지는 자유까지 포함하여 이다지도 아름답다.」


그림을 차지하고 있는 가시를 보면 어떠한 균형이 보이지 않고 피폐하기만 하다. 그럼에도 가시 안에는 가시를 가진 사람만이 아는 나름의 균형이 이미 존재해서, 아무리 엉망이더라도 자신만의 균형 속에서 곡예를 펼치고 있을 것이다.


엄유정, 빙하

성하 : 관점에 따라 다르게 목격되는 빙하를 회화로 여러 폭 옮겨낸 것이 매 순간 존재하는 사건의 형상과 닮았다.

살아 숨 쉬는 모든 것은 대부분 입체적이어서 이런 면이 있으면 저런 면이 있고,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닐 때가 있다. 그러나 종종 이 사실을 잊고 한 부분에 몰두하기도 한다. 그 순간을 경계해야만 한다. 여러 상관관계가 그물처럼 묶여있다고 생각할 때 비로소 시선은 경계 없이 확장된다.


예언의 코멘트 👩‍🚀

사람들은 달의 뒷면을 참 많이들 궁금해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지구를 벗어나지 않는 한, 달의 이면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더욱 호기심을 자극하지 않았을까 싶다.

지구에서는 평생 달의 뒷면을 볼 수 없는 것처럼, 내가 나로서는 타인의 다른 면을 보기 힘들다. 기껏해야 한 면 정도, 많이 봐줘도 열 개 중 아홉 면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열 중 아홉조차 결국 총체성 파악 실패인 셈이다. 그렇기에 타인에 대해서 단언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 사실을 종종 잊는다’는 사실에 깊이 공감하며, ‘한 부분에 몰두하는 순간을 경계해야 한다’는 성하의 말이 어찌나 총명한지 .




4F   자아의 투영: 주관적 세계

유키 사에구사, 프네우마(pneuma)

예언 : 그리스어 프네우마(pneuma)는 정신을 뜻한다. 작가가 제시한 정신은 마치 별세계 같다. 검푸른 색이 그림의 깊이감을 더해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언어로 표현하는 순간 아름다움이 축소될 것만 같은 기분에 그냥 두기로 한다. 정신 또한 단어로 나열하는 순간 세계가 작아지는 것만 같다. 깊고도 오묘한 이 세계를 예술 말고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임수범, 허공을 가르는 작은 생태계, 공생하는 작은 골렘의 세계, 순환하고 호흡하는 세계

성하 : 여러 생물들이 캔버스를 꽉 채우고 있다. 그들은 각자의 표정과 개성을 가지고 생태계 속에 스며든다. 그중에는 크기가 큰 존재, 그에 비해 작은 작은 존재가 있고 서로 다른 방향의 시선을 가진다. 보기에는 복잡하지만 캔버스 안의 것들은 무채색으로 통일되어 이상한 조화로움을 자아낸다.

작은 지구를 보는 것 같아서 뭉클하다. (뭉클하다고 밖에 표현을 못하겠다.) 세상은 항상 시끄럽고 분주하고 화가 많지만, ‘곧 망해버릴 텐데 뭐.’ 하고 자조적인 말을 툭 내뱉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내 곁의 당신들과 함께 굴러간다면 . 비록 무채색이더라도 조화로울 수 있을 거라고 말하는 것 같다.



총평 👩‍💻


예언: 아라리오 갤러리의 공간은 언제 와도 참 좋다. 왜인지 모르게 다른 전시 공간보다 벽이 더 하얗고 조명은 더 밝아 보인다. 자신에게로 침잠하기 딱 좋은 분위기이다. 아라리오 갤러리가 가진 특유의 몽환적인 분위기와 벽에 걸린 작품이 합쳐져 항상 묵묵한 수행을 하는 세련된 구도자를 떠오르게 한다. 이번 전시가 예술의 근본적인 물음에서 시작하여 작가만의 특성을 살린 점이 마음에 든다.

성하: 아라리오 갤러리는 인간 내면의 틈을 집어내는 전시를 잘 구성하는 것 같다. 알듯 말듯한 느낌을 제대로 짚어내지 못해서 발생한 그런 틈들을 메꿔주는 전시였다.

그린 이와 보는 이의 시선이 교차하는 순간마다 현재는 끝없이 새로 태어난다. 지금 여기의 착륙지점에서, 다음 도약의 방향을 가늠하는 잠시의 멈춤 가운데서.

-전시 서문 발췌

끝없이 새로 태어나는 현재에 우리는 잠시 멈추어 선다. 멈추어서 바라보는 것은 각각의 개인마다 또 다를 것이라는 사실이 생경하게 느껴진다. 서로 다른 이 착륙 지점은, 내가 하나의 ‘개인’이라는 사실을 더욱 부각한다. 그럼에도 그 개인은 끝없이 ‘우리’가 되려고 노력할 것이다.







Landing Point 착륙지점
아라리오 갤러리
2024. 1. 10. –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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