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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작가상 2024

예언미 2025. 2. 4. 15:11

«올해의 작가상»은 2012년부터 국립현대미술관이 SBS 문화재단의 후원에 힘입어 운영해 온 전시이자 수상 제도이다. 매년 작가 4인을 선정, 신작 제작과 전시는 물론, 이후에도 각 작가들의 국제적 활동을 폭넓게 지원함으로써 한국 현대미술의 발전을 모색해 오고 있다.
 
전시는 다양한 작품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그에 화답하는 우리의 능력을 확장할 기회를 제공한다. 주제와 방법은 달라도 우리 시대의 단면을 담은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이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기 위해 작가들은 차별화된 시각화 방식을 고안해왔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얼마나 깊이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을까? 어떤 사건을 잊지 않기 위해 어디까지 시도할 수 있을까? 아름다운 삶을 꿈꾸기를 멈추지 않을 수 있을까? 세계와 나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그리하여, 이들의 시선을 빌려 마음을, 기억을, 이웃을, 세계를 다르게 바라볼 수 있을까? 이런 기대 속에서 전시는 대화를 시작하려 한다.
@MMCA
 




윤지영
개인이 어떤 상황이나 사건을 받아들이는 태도, 그리고 더 ‘나은’ 상태를 위한 ‘노력’에 관해 여러 작업을 만들었고, 다양한 방식으로 감춰져 있는 내면이나 내부 구조를 드러내는 작업도 만들어 왔다. 윤지영의 작업은 보통 사회적, 문화적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이야기들 속에서 묘한 불편감을 주는 무언가를 만났을 때 시작된다.
 

<달을보듯이하기 Seeing Things the Way We See the Moon>

작가가 철봉에서 안간힘을 쓰며 버티고 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천장에 묶여 있기에 만약 더 이상 철봉에 매달릴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바닥으로 떨어진다면, 즉시 작가의 머릿가죽은 벗겨질 것이며 동시에 무릎이 깨질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작가는 신체의 어떤 부분도 다치지 않고 유유히 화면 밖으로 빠져나간다. 사다리를 탄 양옆의 두 사람이 작가가 철봉을 놓치기 전 천장에 매달린 머리카락을 가위로 잘랐기 때문이고, 작가가 떨어지는 그 정확한 지점에 거북이 등딱지가 놓여 있어 무릎의 충격을 흡수했기 때문이다.
 
작가가 위험한 상황에서 안전하게 벗어났음에 안도하는 한편, 잘린 머리카락과 깨진 등딱지가 뇌리에 박힌다. 작가의 안녕(安寧)은 이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뉴스를 볼 때마다 속이 시끄러운 요즘, 희생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된다. 희생의 주체와 이득을 얻는 집단, 그리고 그 역학 관계 등에 관해서 말이다. 또한 자신이 하지 않은 일에 커다란 부채감을 가지고 스스로 희생하는 사람과 떳떳하게 비난하는 사람 사이의 간극을 생각하면 섣불리 미래를 낙관하거나 낙망하기 어려운 중첩적인 상황을 맞이한다.
 
희생의 내부를 뜯어보면 상당히 복잡하다. 같은 값의 희생을 치르더라도 누군가는 자신을 이루는 것 중 하나만 주면 될 일을, 누군가는 전부를 내어주는 결단이 필요하다. 각자 가지는 희생의 크기는 전연 다르다는 점에서 어떠한 희생에 관해 타자가 되어 외부에서 바라볼 때 그 의미를 알 수 없어 매우 내밀한 영역에 속한다.
 
작가의 전작들을 살펴보다가 <구의 전개도는 없다>라는 작품을 알게 되었다. 실제로 구는 2차원의 전개도로 표현할 수 없기에 구를 펼쳐서 단박에 파악하기 힘들다. 이는 작가가 천착한 조각의 특성과도 맞닿아 있다. 안과 밖의 작용, 외부와 내부의 불일치, 쉽사리 내부를 탐색할 수 없음... 나는 작가의 이러한 생각을 ‘불확실성을 겸허히 감당하는 용기’라고 부르고 싶다.
 
구의 전개도가 없듯, 동그란 달의 전개도도 없으며, 희생의 전개도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찬찬히 시간을 두고 보면서 어림잡아 볼 뿐이다. 아마 희생은 아주 동그란 무엇이지 않을까.
 


<뱉어내려면 일단 삼켜야하고>

깔때기로 이루어진 구. 그 위로 모래를 붓는다. 깔때기 구멍으로 모래가 빠져나온다. 과정을 반복. 반복. 또 반복... 기어코 어느 순간에 당도하게 되면, 떨어지는 모래의 속도를 전부 소화해낼 수 없어 구 주변으로 모래가 쌓일 것이고 점차 깔때기의 통로를, 입구를 막을 것이고 결국 구조적 메커니즘에 의해 모래가 눈덩이처럼 쌓일 것이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외부의 압력을 받아들이는 개인의 심리적 상태를 보여준다. 모래에 의해 깔때기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할 때가 외부의 압박에 의해 개인이 견딜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상태와 같다. 압박감의 포화는 불능의 상태로 진입하면서 터지고 흘러넘친다. 떨어지는 모래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면 최고의 방법은 떨어지는 모래보다 더 위로 들어올려지는 것이다. 전시장의 깔때기 구는 천장에 매달려 삼켰던 모래를 전부 뱉어낸 상태이다. 이때 작가는 질문한다.
“마음의 무게는 조금쯤 가벼워졌을까?”
 
깔때기에게 부여된 가벼움은 아주 찰나의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의 본래 용도는 뱉어내고 넘치지 않게 흘려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 깔때기는 언제나 일정 부분의 무게를 견뎌야 한다.

따라서 가벼움의 지속은 본래 용도를 다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모래의 포화상태와 동등하게 ‘불능 상태’인 것이다. 우리는 종종, 혹은 자주 모래에 먹혀 아무런 일도 수행하지 못할 때가 있고 그럴 때마다 내 위에 얹힌 모든 모래가 사라지길 빈다. 하지만 삶은 혹독할 정도로 모래 뿌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이때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야 할 것은 나를 모래보다 더 위로 끌어올려 줄 전능한 외부적 힘이 아니다. 무게를 견딜 수 있는 가벼운 숨 한 번이다. 삶은 지겹고 끝이 보이지 않지만 언제나 딱 숨 쉴 정도의 찰나를 제공한다. 나는 이것을 알지만, 매번 까먹고 운다.
 




권하윤
권하윤은 기억과 기록의 방식을 다룬다. 작가에게 가상 현실은 현실의 제약을 뛰어넘어 아직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구현함으로써 공동의 기억 경험을 생산하는 매체다. 작품은 접근할 수 없는 장소나, 마음속에만 살아있는 기억, 또는 기록되지 못한 사건처럼 역사에서 사라진 이야기를 주로 다룬다. 그리고 가상 공간을 빌려 구체적인 경험을 전달하려 한다. 기억을 확장하고 기록의 방식을 재고하기 위해서다.
 

<489년>

489년은 DMZ에 묻혀 있는 지뢰를 완전히 제거하기까지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예상 시간이다. 알다시피 비무장지대 DMZ는 한반도의 군사적 상황으로 인해 접근이 어려운 공간이다. 따라서 작가는 증언과 자료를 통해 DMZ의 모습을 애니메이션으로 재구성한다. 영상 속 증언자(전직 수색대원 김 씨)의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당시 DMZ 안에서 벌어졌던 긴장된 순간이 내 머리에서 재생된다. 내딛는 발아래에 지뢰가 있을 수도 있다는 육화된 가능성이 나의 머릿속에서 재구성된다.
 
작품을 통해 기억을 전달하는 것과 그 기억이 관람자에 의해 재인식되는 과정이 마치 예술과 관객이라는 불특정 집단 간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작품은 관객이 참여하는 순간 의미를 획득하며 그 의미는 관객 수만큼 불어난다. 기억은 불완전함의 반추이다. 일정 부분 손상되거나 과장되어 있기에 개인의 것으로 남는다. 한편 기억은 다양한 방식으로 집단적 향유가 가능하기도 하다. <489년>은 개인 기억의 재구성이나, DMZ라는 집단 상황을 공유하고 있고 관객과 만나며 개인의 몫으로 환원된다. 이때 작품의 의미는 개개인 기억의 합으로 성립한다. 이 느슨한 연결 속에서 개인의 기억이 가장 집단적인 기억이 될 가능성을 발견한다.
 
지뢰를 피해 20분 정도 땅에 엎드려 숨죽였을 때 비로소 DMZ에 있는 들꽃의 아름다움을 보았다는 증언자의 덤덤한 목소리를 듣고 나서부터 머릿속에서 DMZ의 위태로움과 아름다움의 이미지가 충돌했다. 인간의 손길이 오랜 시간 닿지 않아 존재하는, 해체하지 못한 지뢰들과 이름 모를 꽃들. 지뢰와 꽃의 간극만큼 기억의 재구성에는 커다란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집요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꺼내는 모든 과정 속에는 ‘그’ 기억들이 공동체를 단단히 잇고, 엮고, 나아가게 하는 근원적인 힘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양정욱
양정욱은 이야기를 짓는다. 정확히는 그가 바라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짓는다.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늘 어떠한 과정에 있거나 무엇인가 하고 있다. 양정욱은 누군가의 반복적인 행동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는 삶의 모습을 상상한다. 일상의 크고 작은 고난과 희망 사이에서 숫자로만 표시되는 가능성을 뒤로 한 채, 해 보고 또 해 보는 사람들이 그가 다루는 주제다.

<서서 일하는 사람들 #22>

계단을 오르는 일이 있었다.
 
그는 오래된 빌라에 새벽마다 달걀을 배달했다.
빌라들은 엘리베이터가 없었는데
3층이나 5층의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그는 언제부턴가 자신의 일이
달걀을 배달하는 것이 아니라
계단을 오르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서서 일하는 사람들 #22> 일부 발췌

 

작품에는 계단을 오르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직업을 재화나 자아실현의 수단으로 여기지 않고 오로지 행위의 반복과 누적으로만 바라보는 시선이 재미있다. ‘계단 오르기’의 리듬이 갖춰지는 것. 더 이상 일을 하지 않더라도 리듬의 감각을 잃지 않는 것. 리듬이 나의 일부 혹은 내가 그 리듬의 일부가 되는 것. 이러한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얼마큼의 반복이 쌓여야 하는 걸까?
 
한 개인을 쌓이는 시간과 반복으로 만들어진 리듬들의 거대한 축적이라고 생각하면 흥미롭다. 길을 걸으며
우리가 수많은 교향곡들을 지나친다고 상상해 보라 !
 
다만 평생의 반복을 생각하면 딱하기도 하다. 삶을 지속하기 위한 불가피한 노동의 끝이 없음에 관해서 말이다. 눈을 뜨고 이를 닦고 옷을 입는 것. 밥을 먹고 길을 걷고 일을 하는 것. 잠에 들고 꿈을 꾸고 다시 눈을 뜨는 것.
 
작년 여름, 한 달 정도 외국에서 살았는데 이상하리만치 빨래할 때마다 일이 자꾸 꼬여서 애를 먹었었다.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단 한 번도 순탄하게 빨래를 해본 적이 없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예상치도 못한 사건이 터졌고, 어찌저찌 수습한 후 내 머릿속에 하나의 깨우침이 번뜩였다.

‘씨발 빨래 하나 하기가 왜 이렇게 힘드냐’
 
자정이 넘은 파리 시내. 무인 빨래방의 창백한 조명을 받으며 세탁기는 쉴 새 없이 돌아갔고 나는 생의 맹렬한 한 부분을 깨우쳤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빨래를 해야 하는구나. 하루 동안 묻은 체취와 흔적을 지우고 또다시 옷을 더럽히는 일을 죽을 때까지 반복해야 사는구나. 그러고 나면 설거지도 하고 일도 하고 잠도 자야 하는구나. 삶은 권태롭고 덧없는 행위의 반복이구나. 순식간에 생의 존재가 너무나 흉측하다는 생각까지 도달했다. 앞으로 나에게 주어질 시간들과 노동의 양을 가늠해 보았다. 빨래방 주인아저씨의 얼른 나가라는 눈총을 받으면서.
 
어두운 전시실에서 양정욱 작가의 작품들은 작은 불빛들을 밝히며 쉴 새 없이 움직인다. 잠잠한 동시에 소란한 움직임을 들여다보면 지겨운 세속의 것이 아닌 그 너머를 바라보는 구도자의 모습처럼 보인다. 생을 달걀 배달이 아닌 계단 오르기로 느낄 때 그 반복은 구태를 벗고 깨달음을 구하는 간절한 기도가 되기도 하는구나. 그 순간 반복의 리듬을 아주 흠뻑 적시고 갈증을 해결하고 싶어졌다.
 
 



제인 진 카이젠
제인 진 카이젠은 강렬한 시각성을 동반하는 시적이고 수행적인 영상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작업은 생생한 개인의 경험과 정치적 역사의 교차점에서 기억, 이주, 국경이라는 주제를 다룬다. 그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또 다른 주제는 자연과 섬, 우주론,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재구성된 신화, 제의적이고 영적인 실천에 대한 참여다.
 

<할망>

이 작품은 바다를 앞에 둔 검은 바위 위에서 평생을 해녀로 산 8명의 여성이 소창을 손보는 과정을 담은 퍼포먼스 영상이다. 소창은 길고 하얀 면직물로, 갓난 아기의 기저귀부터 관을 묶는 끈에 이르기까지 생애 전반에 걸쳐 사용된다고 한다.
 
소창을 만지는 그들의 거침없는 손길, 다음 순서를 떠올리지 않고도 순조롭게 흐르는 몸짓, 오랜 시간 합을 맞춘 듯 상대와 꼬이지 않는 동선. 이 모든 것이 어딘가 무속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동시에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 속에서 진행된다. 마치 무용과 같은 그들의 모습을 넋을 놓고 지켜보다 보면 어느새 흰 천으로 덮인 바위가 된다.
 
구체적인 이야기를 전달하지 않지만 흐릿하게 서글픔이 몰려온다. 이는 개인의 역사일 수도, 집단의 기억일 수도, 혹은 개인의 경험의 공동체적 연결일 수도 있겠다. 나는 구태여 캐묻지 않고 다만 자리를 지켜 똑똑히 목격함으로써 받아들일 뿐이다.
 
유달리 서러운 지역이 있다. 어떤 곳은 스스로를 쉽게 용서하기도 하고, 어떤 곳은 시간이 지나도 잊지 않을 장면을 꽉 쥐고 있기도 하다. 나는 그 어딘가에도 속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과한 끄덕임도 가벼운 침묵도 어딘가 아귀가 맞지 않거나 훨씬 모자르다는 부채감이 든다. 이 거리감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아니면 해결하는 게 맞는지 하는 생각이 든다.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뎌지지 않는 것이다.
 

어두운 전시실이 마치 바다처럼 느껴졌고 제인 진 카이젠 작가의 작품이 상영되는 스크린들이 섬과 같았다. 그리고 바쁘게 움직이는 관람객들은 무심하게 앉았다 이내 흩어지는 새들과 같아 보였다. 작품을 보다가 홀연히 떠나가는 관람객과 그 자리를 지키는 작품들에 제주도의 모습이 투영되어 보였다. 많은 이별과 떠나감을 삼킨 바다는 굉장히 시리게 느껴진다.
 




 

전시 «올해의 작가상»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1,2 전시실에서 올해 3월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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