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카이브 🗂️

노상호: 홀리

변성하 2024. 4. 30. 10:01

📀 ••• ❇️ !

노상호 작가의 개인전이 서울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열렸다. AI가 임의로 추출하는 이미지에 기반해 작업하는 독특한 방식을 추구하고 있는 그는 불완전한 기술에서 발생하는 이미지의 어긋남을 되려 이용한다. 이는 일종의 노이즈인데, 비현실적 이미지가 현실과 맞닿는다는 점에서 종교적 차원의 기적과 개념을 공유한다. 두 작품을 뺀 모든 작품의 제목이 <홀리 HOLY>인 것도 이의 연장선이라 판단된다.


Holy ! - 예언 🗯️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노상호 작가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바로 이 광택감을 가진 회색 토끼이다. 이번  작품에서는 토끼 머리 세 개가 하나의 몸을 공유한다. 그의 작품세계 혹은 어디든 부유하는 이미지의 세계에서 이는 지극히 평범한 모양새일 테다. 그렇게 모든 것이 모호해지고 명확해진다.



불타는 숲과 매캐한 연기, 한껏 웃고 있어서 소름 끼치는 거대 눈사람(곧 말을 걸 거 같다), 꿍꿍이가 있는 듯 의뭉스럽게 팔을 활짝 벌린 사람. 모든 요소가 너무나 이질적이라서, 그런데도 한 화면에 태연하게 담겨 있어서, 지극히 평범하다는 착각을.

성하의 코멘트 👀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서 든 생각 -
맞아 나는 평범하지 않은 장면들이어도 예술 작품 속에 들어가면 힙하다 ! 좋다 ! 라는 생각에서 멈춰버리는 경향이 있었어. 그 장면이 얼마나 이상하고 어떨 땐 잔인하기도 한 장면인지를 생각하지 못한 채로 말이야.

근데 이 작가는 뮤직비디오를 만들어도 멋지겠다 !! 그치 ! ?



노상호 작가의 그림에는 사슴이 많이 등장한다. 빈번히 등장하는 이미지들이 여럿 있지만, 그중에서 특히 사슴은 항상 빛나고 있기에 작가에게 사슴은 어떠한 영적 존재의 메타포인가 하는 생각이다. 해리포터에 나오는 패트로누스 같기도, 하루키의 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 나오는 단각수 같기도 하다. 녹색 하늘과 빛나는 사슴이 금방이라도 현실 세계로 넘어올 것만 같다.





Holy ! - 성하 🗯️

나는 어린 시절부터 동심이 없었던 탓에 <스노우맨> 애니메이션을 극도로 무서워했다. 다들 <스노우맨>을 아시나요? 어린아이가 집 앞에 쌓인 눈으로 사람만 한 눈사람을 만들었는데, 밤 12시가 되니 그 눈사람이 살아 움직이며 아이와 함께 그 집을 휘젓고 다니는 내용의 애니메이션이다. 일단 나는 눈사람이 갑자기 살아 숨 쉰다는 전제부터 무서웠다. 애니메이션은 전반적으로 차가운 색감을 띠었고, 중간에 나오는 OST도 굉장한 고음을 내는 곡으로 꽤 소름 끼친다.
내가 <스노우맨>에 더하여 이상한 불쾌함을 느끼는 또 다른 것은 앤서니 브라운의 <돼지책>이라는 동화다. 집안일에 극도로 지친 엄마는 집을 나가고, 남은 가족 구성원들이 다 돼지로 변해버리고 마는.. 대충 그런 내용의 동화로 기억한다. <돼지책>의 그 그림체. 나는 그것으로부터 원인 모를 찝찝함과 불쾌감을 느꼈다. 엄마는 이 작가의 동화책을 매우 좋아했는데 말이다.

서론이 길었다. 나는 이 작품에서 <스노우맨>과 <돼지책>을 다 합쳐 놓은 것만 같은 찝찝함을 똑같이 느꼈다. 집 앞에 있는 거대한 스노우맨, 그리고 그 앞에 서있는 두 명의 아이들은 돼지책에 등장하는 그 형제와 닮았다. 곧 우박이 내릴 것만 같은 칙칙한 하늘, 세 개나 달린 눈사람의 머리, 유독 선명하게 그려진 아이들은 그 괴이함을 배가한다.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에는 유독 께름칙한 일들이 많았다. 그 당시에는 그 감각을 몰랐기에 그저 찝찝함만 남고 지나갔지만, 지금에는 의문이 드는 순간들이다. 나만 이런 건가? 누가 논문이라도 써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작품을 지나쳤다. 인간 다움은 어떠한 느낌을 감각하고도 아리송하게 알 듯 말 듯한 그런 순간으로부터 발현하는지도 모른다. 나만이 감지하는 그런 사소함과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감각들이 모여 인간을 이룬다.

예언의 코멘트 👀
성하는 어린 시절에 어떤 께름칙한 일을 겪었는지? 성하의 글을 읽다가 문득 떠오른 기억은, 내가 초등학생 3학년 때. 피아노 학원 끝나고 혼자 집 가는 길에 만난 어떤 여자에 관한 이야기. 나이대를 알 수 없는 여자는 헝클어진 머리에 검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현관으로 들어가려는 나를 빤히 쳐다봤다. 아-주-빤-히. 당시는 팬데믹이란 걸 상상할 수 없었기에 길에서 마스크를, (그것도 연예인이나 쓰던 검은 마스크를 !) 눌러쓴 여자의 존재만으로도 머리카락을 쭈뼛 서게 만들었다. 그러나 더욱 께름칙한 일은 기억을 되짚을수록 여자의 옷은 빨간색 원피스 같다는 것이고(이는 다수의 공포 영화를 시청한 후 왜곡 알고리즘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아주 농후하다), 가장 께름칙한 일은 계속 기억할수록 나의 기억은 내 것이 아닌 것만 같다는 것. 어린 시절에 유독 께름칙한 일이 있었다는 건 순수와 맑음에서 비롯된 건 아닐까 ... 




 

만약 내 손이 저렇게 된다면 Holy(shit)라 외쳤겠지.
인간과 기계 그 언저리에 있는 사이보그. 언젠가는 사이보그가 생기고야 말 것이라는 그런 굳건한 믿음은 이미 내 머리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 그날이 오면 기다렸다는 듯 체념할 것만 같다. AI가 이제는 인간들의 삶에 너무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든다. 이에 서둘러서 적응한 사람들은 그것을 유용하게, 어떨 땐 재미까지 톡톡히 챙겨가며 사용한다.
AI를 거부해서는 도태되어 버릴 것 같아 나는 걱정한다. 아날로그를 고수하는 것도 나의 취향일 뿐, 세상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에 실용적인 방법은 아니라는 걸 안다. 그러나 이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기술에 대한 거부감, AI에 대한 미약한 공포는 나도 모르는 사이 점점 - 점점- 영역을 넓히고 있는 것 같다. 인공지능을 마주할 때마다 내가 어떤 기술의 간섭 없이 존재하는 하나의 인간이라는 사실이, 내 안에서 괜히 부각된다. 어쨌든 변화하는 시대에 유연히 대응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말이다.
나에게 기술은 참 무궁하게 두려운 존재다. 그것의 무궁함이 내 공포를 무궁하게 만든다.





총평 🧐

예언 : 나는 노상호 작가만의 독자적인 세계가 참 마음에 든다. 마치 무의식을 헤집는듯해 묘한 감정을 불러온다. 무엇보다도 아라리오 갤러리의 건물과 참 어울리는 작품이라는 생각이다. 화이트 큐브에 걸려 조명을 받을 때 무언가 확실하게 꿈틀댄다. 깨끗하고 침묵을 지키는 미술관과 정반대의 무언가가.

성하 : 노상호 작가의 작품을 보면 항상 동시대를 따라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로부터 배움이 있다. AI가 만들어낸 이미지와 사람의 손길이 합쳐진 그 작품들은 어딘가 기이함을 자아낸다. 그 와중에 또 키치도 챙겨간다는 게 신기하다. HOLY 연작인 만큼, 한 작품을 뺀 나머지 모든 작품의 제목이 HOLY였다. 제목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더욱 내 감상이 주가 될 수 있던 전시였다.











노상호: 홀리
2024. 02. 29. – 04. 20.
아리리오갤러리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