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카이브 🗂️

구본창의 항해

예언미 2024. 1. 16. 09:15

🛳️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는 구본창 작가의 대규모 회고전. 방대한 아카이브 전시. 🗂️



구본창 Koo Bohnchang

instagram_@koobohnchang

대한민국의 사진가이자 교수이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 기업에 취직했지만 반년 만에 회사를 그만둔 후 독일 유학에 올랐고 사진작가가 되었다. 2008년에는 대구사진비엔날레 예술 감독을 맡았으며 현재는 경일대학교 사진영상학부 교수를 역임하고 있다. 📸




예언 👩‍💻

<생각의 바다>

생각은 바다와 같다.
쉴 새 없이 변화하며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깊다.

망망한 심연 속에서 표류하는 숫자, 글자, 누군가의 인영과 자취. 요즘 내 상태가 <생각의 바다>처럼 한계 없이 어수선해서 쉽게 와닿았고 그래서 간단하게 비참해졌다. 작품 마주하기가 꼭 나의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한층 더 엉망이 되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가장 먼저 꿈을 되짚으며 나의 무의식을 측정한다. 기민하지 않으면 꿈은 금방 사라지기에 나름의 고도화된 꿈 훈련이 필요하다. 하여튼 요즘 꿈들은 대체로 불안정하고 방정맞아서 불길하다. 자체 진단을 한 결과, 불길함의 원인으로 ‘사실 안 궁금했는데 알게된 정보의 과잉에 무감해짐’이 뽑혔다. 인스타그램을 슥슥 넘기며 알게 되는(따지고 보면 ‘알게 되는’보다는 ‘반복 노출 되어 각인되는’에 가깝다. 이 점이 정말 화나는 부분이다.) 가십거리가 대표적인 예이다. 이것들이 무의식에 쌓여 찝찝함을 완성시킨다. 이불에 붙은 먼지처럼, 잘 보이지 않지만 다음날 일어나면 목이 칼칼할 거 같은 불길한 느낌이다. 비가시적인 과잉의 무게가 피로하다. 주기적인 대청소가 필요하다. 모든 청소가 그렇듯이 미뤄서 쌓이면 손댈 수도 없다.

쌓이기 전에 움직여야 한다.




<문라이징 III>

세계 곳곳에 소장된 백자 달 항아리 12개를 촬영해 달이 뜨고 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곡선으로 된 가벽에 시야보다 살짝 높이 있어서 달 항아리를 관람하는 것이 마치 밤하늘의 달을 보는 행위로 이어진다. 게다가 주변은 어두워서 눈만 감으면 소원을 빌어야 할 듯 영험한 분위기까지 조성한다.

달 항아리의 고결한 모습을 보면 절로 아름답다는 소리가 주체할 수 없이 쏟아진다. 속된 말로, 달 항아리를 볼 때마다 ‘힙하다’고 느낀다. 나에게 ‘힙하다’는 굉장히 복합적이라 설명 불능의 단어인데, 그럼에도 표현해보자면 달 항아리가 힙한 이유는 애쓰지 않고 아름다워서 그렇다. 넉넉하게 아름다워서 그렇다.




<콘크리트 광화문>

‘강한 자만 살아남는 8-90년대’, ‘낭만의 시대’라는 밈이 된 시대의 한 부분이 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사회 모습을 웃음으로 승화한 것인데, 따지고 보면 이만큼 무서운 말도 없다. 문명화된 사회에서 통용되는 약육강식의 논리는 진화하지 못한 야만적 면모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광화문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담고 있는 유구한 공간이자 누군가에게는 헤게모니를 쥐기 위한 전쟁터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출퇴근을 하고 책을 사는 일상의 공간이다. 현재까지 생생히 살아있는 광화문은 사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부분 소실되었고, 복원 과정에서 시간과 비용을 문제 삼아 기존의 목조가 아닌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하였다. 이후 2006년 재복원을 하는 과정에서 콘크리트로 만든 부재를 해체했고, 구본창 작가는 광화문의 역사와 시대적 아픔을 드러내기 위해 이를 사진으로 남겼다.

문화재의 가치를 경시하고 효율만 따지는 시대적 사고 속에서, 그럴싸하게 만든 콘크리트 부재는 당연한 수순처럼 보이며, ‘강한 자만 살아남는 시대’를 표상한다. 주먹구구식의 시대 체계가 아찔하다. 그러나 더욱 아찔한 점은 지금이 ‘강한 자만 살아남는 시대 - 2024년 버전’ 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사회가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 허상일까 두렵다.




성하 👩‍💻

호기심의 방

구본창은 유년 시절부터 사물에 대한 호기심이 남달라, 그의 마음에 들어오는 사물은 버리지 않고 수집했다. 전시의 입구에는 그의 중학생 시절, 처음 찍은 사진작품인 자화상을 시작으로 호기심의 방이 구성되어 있다.

구본창의 일대를 보여주는 전시인 만큼 호기심의 방 섹션이 앞에 위치해 있어서 매끄러운 관람이 가능했다. 전시장 곳곳에는 그의 작품을 보충설명 해 줄 수 있는 여러 아카이브들이 함께 있다. 그 양이 너무 방대해서 자칫하면 너무 루즈하다고 느껴질 수 있었는데, 호기심의 방을 통해 ‘수집’에 대한 그의 예쁜 집착을 보아서 그 많던 아카이브가 소중하게 느껴졌다.

사물이 아니라 물건이라는 말을 쓰고 싶다. 교환될 수 있는 말이긴 하지만 ‘물건’이라는 말이 조금 더 나와 가까운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호기심의 방에 있는 본창의 물건들은 삶의 냄새를 물씬 풍겼다. 🗃️




About Archive 🗂️ ••

작가의 아카이브를 쭉 보다 보면 눈길이 오래 머무는 것이 바로 이 네 컷 사진들이다. 독일로 넘어가 공부를 시작한 그의 청춘에는 이런 기록들이 많이 남아있다. 홀로. 표정의 변화 없이 찍은 이 사진의 배경이 궁금하다. 그 시절 본창의 타지 생활은 어떠했을지 궁금하다. 철저하게 홀로 꽉 찬 프레임 안은 이방인의 메타포다.

네 컷 사진들

사진 한 장 한 장은 각각 찍은 것이지만 여러 사람들의 사진과 함께 놓여있다. 같은 배경, 같은 구도와 조도의 사진들은 그들이 한자리에 있었음을 암시한다. 새로운 인연의 시작이겠구나 생각한다. 응원하고 싶어 지는 청춘이다.

어떤 사진

유독 그의 아카이브에 집중하게 되는 것 같다. 그중에서도 이렇게 흐릿한 사진들이 좋다. 흐릿하고, 안개 끼고, 누군지 알아볼 수 없는 검은 실루엣에 나를 투영한다. 사춘기 속성의 말이지만 나도 아직 나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모순적이게도 이런 흐릿함에서 안정을 느낀다. 흐릿한 노래, 흐릿한 영화, 흐릿한 삶은 나를 대변하는 것 같아서다. 언젠간 뚜렷해지겠지라는 막연한 기대도 안고서 살아간다.



ⓒ 릴리슈슈의 모든 것 _ 스틸컷

추신.
사진을 보고서는 너무 사랑하는 영화 ‘릴리슈슈의 모든 것’을 떠올렸다. 릴리슈슈를 애정하는 것도 확실하진 않지만 위와 같은 이유에서 인 것 같다.

꽤 흐릿한 음악 하나를 추천한다. 작년 8월, 본창이 유학을 했던 독일로 나도 한 달간 유학을 다녀왔다. 프랑크푸르트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릴리슈슈의 ost인 이 음악을 들으며 갔던 기억이 있다. 착륙 전 곧 이방인이 될 나를 생각하니 정신이 어지러웠기 때문이다. 누구도 나를 모르는, 철저하게 흐릿한 이방인이다.

▶️ Ai no Jikken 🎧




<익명자71>

익명자. 또는 비슷한 이방인이라는 신분은 불안하면서도 매력적이다. 아마 책임이 조금 덜어지기 때문이 아닐까. 무슨 짓을 벌이든, 어떤 시선을 가지든 사람들은 익명자에게 관심을 붓지 않는다. 모든 것이 자유로워지는 상태에서 우리는 과감해지고, 무모해지고, 커지고, 시도하는 것 같다. 그래서 초점 나간 이 그림의 모습 자체가 좋다. 누군지 모를 익명자의 행운을 빌며 . 🍀






총평 📸


예언 : 구본창. 나는 그를 헤비 컬렉터 Heavy Collector라고 부르려고 한다. 그 시절 인생네컷부터 잡지, 편지는 기본이고 양질의 방대한 수집 목록을 유리관 너머로 바라보고 있자면 그의 작업실, 서재, 서랍이 궁금해진다. 얼마나 세심하고 꼼꼼하게 모았을까?

구본창 작가가 모은 수많은 영원성이 감탄스럽다. 그가 컬렉션에 부여하고 그의 작품으로 얻은 영원의 질감이 선명히 읽힌다. 이번 아카이빙 전시는 시간에도 무뎌지지 않는 구본창의 세련된 감각을 음미하기 좋은 시간이었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 했다.
그러기가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 헤르만 헤세, 데미안


전시장 입구에 붙어있었으나 전시가 끝날 때까지 마음에 감돌던 문장이다. 내가 나로서 살아가기가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다. 독일과 한국을 오가며 이방인의 삶을 살았던 구본창 작가도 이를 치열하게 고민했겠지. 아마 모든 인간은 집시의 운명을 타고난 듯하다. 평생 나를 찾아 방랑하다 생을 마무리하는 집시의 운명이 아른거린다.



성하 :

나는 시각적으로 보이는 것을 최소화하면서 렌즈 너머로 펼쳐진 화폭 안에 사적인 함축을 담으려 한다. 생명의 숨소리가 들리는 순간들에 인위적인 파격을 가하지 않고 스트레이트 하게 찍지만, 오히려 추상에 가까워진 단순화된 이미지 속에는 더 깊은 공간과 많은 이야기와 흔적들이 담긴다.
-구본창, 『공명의 시간을 담다』

아직 사진은 어렵다고. 예언과 계속해서 얘기를 나눴지만, 이 말에 깊은 공감을 보내며 나의 관점을 확장한다.
사진이라는 찰나를 포착하는 예술에서 우리는 함축된 언어를 말없이 나눈다. 본창의 사진에서는 그 함축이 신기하게도 잘 전달되었다. 그가 카메라를 통해 담고 싶던 것들, 렌즈로 본 것들.. 카메라와 함께한 그의 항해가 이토록 거룩하다.






구본창의 항해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2023. 12. 14 - 2024. 0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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