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카이브 🗂️

Tate Britain in London

예언미 2023. 9. 14. 11:26

테이트 브리튼 

런던에 위치한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은, 잘 알려진 테이트 모던과 함께 테이트 갤러리 네트워크에 속한 미술관이다. 개인적으로는 파리와 런던에 있는 많은 미술관 중 가장 기억에 남은 미술관이다.


 

 작품 소개 

입구에 들어가자마자 관람객들을 맞이하는 헨리 무어! 헨리 무어의 시그니처인 부푼 몸과 매끈한 실루엣. 유기적인 곡선과 풍부한 양감. 그 자체로 생동감이 느껴진다. 조각을 보고 있으면 순환적인 세상의 질서가 추상적으로 다가온다. 더욱이 테이트 브리튼의 연녹색 벽과 개방감 있는 홀에 놓여 있으니 무언가가 증폭되어 느껴졌다.
 
 
 
 
 

데미안 허스트의 죽음 시리즈 중 <Away from the Flock>이다. 이 작품은 실제 어린 양을 박제한 후, 공업용 방부제인 포르말린 용액을 채워 만들었다.
 
처음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을 배울 때, 커다란 상어가 거대한 포르말린 수조에 담겨 있는 것을 보고 받았던 충격이 아직도 생각난다. 도발적인 그의 작품보다 <살아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이라는 긴 제목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꼈다. 어디서 끊어 읽는지에 따라 중의적인 의미를 띠는 것일 텐데, 내가 해석한 바는 이러하다.

우리는 데미안 허스트의 죽음 시리즈를 통해 상어와 양, 그 외의 다른 동물들의 죽음을 눈앞에서 본다. 이는 죽음의 물리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관람자인 나를 포함한 우리들은 수조 속 죽음에서 나의 죽음을 발견하지 못한다. 막연하게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것은 알지만, 나의 죽음은 멀리 있는 것처럼 여긴다.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바로 살아있는 자의 마음속에는 죽음이 없고,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만 재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데미안 허스트는 우리에게 죽음을 선사하며 죽음을 친숙하게 여길 것을 당부하는 듯하다.
 
동물 보호 단체의 비난을 받는 이 화가가 뛰어난 이유는, 죽음을 통해 삶에 대한 연약함을 어떠한 포장 없이 드러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 삶의 결말은 죽음이기에 연약하다는 것. 포르말린에 갇혀 영원히 썩지 않을 살덩이를 가진 양을 보면서 역설적으로 썩어야만 하는 죽음이 보아야 한다.
 
 
 
 
 

오노 요코의 <Cut Piece>
비디오 작품이라 이미 한국에서도 관람했던 작품이지만 실제 뚱티비로 보니 그녀의 눈빛에 기개와 강인함이 담겨 있었다. 어떤 이가 무슨 방식으로 얼마큼 나의 옷을 잘라갈지 모르는 상황. 비디오 마지막엔 결국 속옷 차람이 된 오노 요코.
 
현대인의 옷은 원시에서 벗어나 문명화가 되었다는 일종의 증거. 그리고 그것이 차츰 사라지는 과정을 통해 드러나는 간신히 덮고 있던 현대인의 신경증적 불안.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 W. 터너. 그래서 그런지 윌리엄 터너의 작품은 따로 방이 마련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신사는 못 되는 사람이라 로열 아카데믹적 풍경화에는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흥미 없이 스쳐 지나가듯 미술관의 공기만 관람하고 있었는데 글쎄 !!!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예술가인 마크 로스코의 작품을 만났다. 아주 우연찮게 !

Untitled c.1950-2

종종 나는 마크 로스코와의 첫 만남을 상상하곤 했다. 처음 마주하는 그림은 레드 연작일지 혹은 로스코 채플 그림일지. 그 앞에서 어떤 감정의 눈물을 흘릴지 등에 관하여. 정작 내가 처음으로 만나게 된 로스코의 작품은 강렬한 레드도 아니고 깊은 블루도 아니고 나물 무침처럼 심심한 색이었다. 역시 모든 것은 예상을 빗나가는 법이다.
 
윌리엄 터너 전시관에서 마크 로스코의 작품을 만나게 되다니. 터너 전시관에 생뚱맞게 로스코의 작품을 전시해 둔 테이트 브리튼의 고약한 장난에 철저하게 걸려든 것이다. 이 모든 우스꽝스러운 상황에서 예상을 빗나가지 않던 한 가지는 바로 눈물이었다.
 
로스코 작품 바로 앞에 놓인 소파에 가만히 앉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이름 모를 벅차오름과 동시에 눈물이 떨어졌다. 마크 로스코 작품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린다더라 하는 이 오싹한 증언에 나도 숟가락을 얹게 된 영광스러운 순간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나의 눈물의 의미는 위로였던 것 같다. 마크 로스코가 그린 색면이 차분하게 부유하는 모습을 목격했을 때 그 압도와 경이로움이 일종의 종교적 체험으로 다가왔다. 구체적인 트라우마에 대한 위로라기보다, 앞서 데미안 허스트가 제시한 죽음과 엇비슷한 존재론적인 고통에 관한 위로였다. 다음번에는 꼭 로스코 채플을 가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아쉬운 발걸음을 뗐다.
 
 
 
 
 

벤 니콜슨의 <white relief sculpture - version 1>

작가도 작품 제목도 처음 알았다. 그런데 왜 이 작품을 골랐냐면 ...
 
마크 로스코를 본 후 더 이상 어떤 작품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떠한 방법을 사용해도 집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얼른 아트샵으로 피신하는 도중 마지막에 본 작품이다.
 
이 작품은 고등학교 1학년 미술 교과서에 실려있었다. 당시 열일곱 나예언은 미술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부끄럽지만 미술 이론수업이면 어김없이 졸던 학생이었다. 어찌 된 일로 벤 니콜슨의 작품이 머릿속에 담겨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당시 흥미 없이 넘기던 미술 교과서에서 이상할 정도로 오래 기억에 남은 작품이었다.
 
홍차에 적신 마들렌 냄새를 맡은 것처럼, 이 조각을 보자마자 내 인생을 이끄는 거대한 질서를 느꼈는데, 그 이유는 17세 나예언은 22세 나예언이 미술을 전공으로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못했기 때문이다. 수험생 시절 단 한 번도 예술을 꿈꿔보지 않았지만 어떤 거대한 질서 속에서 현재의 내가 만들어졌다는,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 머릿속에서 퍼즐 맞춰지듯 느껴졌다. 과거의 나를 소환한 벤 니콜슨의 작품 앞에서 나의 미래를 감히 상상해 본다.
 
 

 

 
 
 

Tate Britain
Millbank, London SW1P 4RG England
https://www.tate.org.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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